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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 지명유래

용덕면 운곡 어화마을

작성자
용덕면
작성일
3581
등록일
2003.08.21
읍면
용덕면
첨부

용덕면 소재지가 운곡리이며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뜸이 어화마을 또는 「원껄」이라고 부른다. 옛문헌에는 파산이씨가 사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용암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돼 있다.

다만 지명 유래에서 흔히 볼수 있는 雲谷은 구름골짜기란 의미가 아니고 한쪽 구석으로 치우치다거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 앉은 지대를 「굼티기」니 「굼턱」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옛날 굼말, 굼실로 불러온 곳인데 한자표기때 쉬운대로 굼을 구름(雲)으로 쓴 것이니 이같은 예가 더러 있다.

칠곡의 굼실이 운곡, 가례의 굴바구(굴바위)를 구름바위로 보고 운암으로 정한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옛시절에는 큰동네가 아니었다고 하며 지금은 한길 부근이 어화리에 속했던 탓에 어화주막걸이 었고 조금위가 원껄 또는 원앞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꽃집과 창고 있는 그 뜸으로 박계원(朴溪院,朴桂院)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당시 院이란 驛站제도가 있을 때 역과 역의 사이에 둔 국영기관으로 공무로 지방을 여행하는관리들이 숙식을 할 수 있고 말(역마)을 얻어 탈수 있는 여관과 비슷한 곳이었다. 각 원에는 院主를 두었는데 대개 가까이 있는 절의 스님을 원주로 삼은 예가 많았다고 하며 이 원주란 말을 원님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고을의 원님(현감이나 군수)과는 엄격히 구별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마을이 원터이기 때문에 원껄(거리란 말을 꺼리→껄로 씀, 장터거리를 장터껄, 주막거리를 주말껄로 많이 부름)원앞껄이란 지명이 쓰인 것이다. 또 새터는 지금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부근을 말하고 그 위가 웃땀이고 길 건너가 건네땀이라 부른다. 결국 주막껄, 원껄, 건네땀, 새터, 웃담등 5개의 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서남쪽에 팔봉산이 있고 옛날에는 소리비 동네로 넘어가던팔빙이재가 있었고 작은 못이 있는 산골짜기인데 또 옹달샘이 있어서 꼭 음부와 같아서 보지골이었는데 좀 상스럽다해서 보작골(보자골)로 고쳐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를 벗어나오면 산자락에 윤시재실이 있는데 이곳을 덤붕이골 또는 덤붕이 모팅이라고 부른다. 덤붕은 들논가운데 있는 웅덩이를 말하는 바 옛날 길옆에 큰 물웅덩이가 되었다고 하고 어떤이는 뜸부이(새)가 많이 살았던 골짜기라서 그런 지명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

들이름도 원앞들과 세마들(새마들)이 있는데 새마들은 새동네 옆이라 자연스레 그런 지명이 쓰인 것이다. 원껄에는 영조때 합천에서 정희량이 역난을 일으켰는데 무예가 뛰어난 이영무(자는 국보, 호는 농아당공이 관군과 함께 토벌장을 참가하여 역난을 진압한 공로가 인정되어 가선동중추에 오르고 또 사후에 자헌대부공조판서에 추증된 분인데 이곳에 그의 사적과 함께 신도비가 서 있다.

효부유인경주최씨 효열비가 있는데 남편이 이상팔공으로서 이 최씨부인은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병으로 누웠다. 겨우 18세인데 병중의 남편을 지극히 보살폈고 나중에는 자기 볼기살을 떼어 약으로 드리고 날마다 치성을 드렸으나 만사 휴의였고 남편따라 죽을려고도 했으나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다. 조카를 양자로 맞아 훌륭히 키우고 가문을 이었으니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손자가 서둘러 향내 어른들과 의논해 조모님의 효열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곳 나직한 산76번지의 산자락과 골짜기 일대가 보통 개장골이니 개장터로 부르고 있는 곳인데 가야후기의 횡혈식고분군이 많이 분포돼 있다. 1996년 일부를 긴급발굴을 했는데 특히 주목할점은 석실의 벽면에 반타원형의 동장(胴長)구조로 축조된 것고 상단부의 종방향의 돌출된 선반모양의 구조물 때문에 한일양국 고고핵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4기만 발굴한채 30여기의 고총고분은 발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발굴된 고분에서는 대부장경호, 고배, 수평구연호 등의 토기류와 관정, 철검, 대도, 철촉, 철부, 도자 등의 철기류 그리고 금동제 세환이식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나 앞으로 이 일대의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네 밑 덤붕이 길가에는 열녀유인 전의 이씨기행비가 서있다. 16세때 결혼한 부인은 남편이 중병에 걸려 보살폈으나 죽고 말았는데 삼우제를 지낸 뒤 남편을 따라 자진했다는 것이다. 19살의 꽃다운 나이라 향내 유림들이 의논해 수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덤붕이골안 동남향으로 내려온 산줄기 중턱에는 통훈대부중추원의관 광주이공지묘가 있는데 옛시절 큰부자로 알려졌던 우무실 이부자(이도재공)의 선대인 죽포 이용화공이 내외분의 묘로 썩좋은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십여년전 석등.문인석,석양등 잘 갖추어진 석물을 도굴꾼에 의해서 도난을 당하기도 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되찾아 세웠다고 한다. 이 번에는 고분발굴작업을 한 조금위쪽 산위에는 벽진이씨문중의 선대묘역인데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이희보공, 훈련첨정 어화당 이백공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제단비가 서 있다.

이 동네에는 파산이시가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합천이씨가 들어 왔다고 하며 지금은 함안이씨 20세대, 담양전씨 15세대, 진양강씨 12세대, 김해김씨와 경주최씨, 밀양박씨가 대여섯집씩이고 다른 성바지도 한두집씩 모두 90여가구로 큰 동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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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 용덕면 총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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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1-18